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문단 편집) == 그리스인과 튀르크인 구분의 난점 == 아나톨리아는 [[리디아 왕국]] 등 관련 기록을 보듯 청동기 시대까지는 그리스 문화권과 별개의 문화를 지닌 지역이었으나[* [[헤로도토스]]는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왕국]]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시아인들은 당시 그리스인이나 이집트인 및 그리스 서쪽이나 북쪽의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나체 노출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는 기록을 남겼다.] 기원전 8세기 이후 그리스 폴리스들이 에게해 연안을 따라 식민도시[* [[에페소스]], [[밀레토스]], [[페르가몬]]이 대표적이다.]들을 세우면서 오히려 그리스 본토보다 그리스 문화가 더 번영을 누렸을 정도로 융성을 거듭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인 [[헬레니즘]] 시대 이후부터는 [[셀레우코스 제국]], [[폰토스 왕국]] 등등이 내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확고한 그리스 문화권 지역이 되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도 이 지역은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통용되었고 그리스 반도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서기 3~4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번영을 유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로마제국]] 치세를 지나면서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지방어가 사멸되고 내륙 농촌의 주민들까지 모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즉 이곳은 모두 그리스 문화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세 [[만지케르트 전투]]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튀르크인이 들어와 그리스인들이 살던 아나톨리아에 자리잡게 되었다. 뒤늦게 들어온 튀르크인들은 원래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한 것이 아니라 신민으로 지배했고 결과적으로 11세기부터 동거하게 된 이 두 민족은 서로 엄청난 영향을 주고 받게 받았다. 동로마 제국 시절 튀르크인이 동로마 제국군 용병으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었고([[투르코폴레스]]) 반대로 오스만 제국 시절 그리스인이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파나리오테스]])도 있었다. 서로 결혼하는 일도 흔했고 튀르크인들이 동로마 제국 지배 아래서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 아래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일도 잦았다. 오스만 제국 시절만 쳐도 500년 넘게 같이 부대껴 산 것인데 실제로는 [[만지케르트 전투|만지케르트]] 이전부터 튀르크인은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그리스인과 살았으니 그러니 실제로는 1,000년 가까이 좋든 싫든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은 나란히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두 민족이 비슷한 영토에 살았는데 [[통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던 아나톨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민족의 근거지인 발칸반도 남부조차도 튀르크인들이 적지 않았다. 오늘날 그리스 도시 각지에 오스만 시대 모스크 유적들이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된 것만 보아도[* 아테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성당 외벽에 아랍어 쿠란 글귀가 그대로 남아 있다던지] 그 규모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더욱이 [[가가우즈인]]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2세기 전 서기 13세기 무렵부터 튀르크인 용병들이 발칸 반도 각지에 용병으로 정착했고 이는 그리스인과 튀르크인 사이의 구분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가 약 4백여 년간 오스만의 지배를 받는 동안 튀르크족들은 여러 이유로 제국의 전역에 퍼졌는데 그리스 영토에도 상당수의 튀르크인들이 이주해 왔다. 오스만 술탄은 군인들에게 이크타(اقطاع)라는 토지 수조권[* 고려시대 [[전시과]] 제도와 유사한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토지를 하사받은 사람이 죽으면 토지는 다시 술탄에게 되돌아가게 되어 있었다.]을 하사했고 튀르크 전사들은 그리스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두게 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을 때부터 그리스인 이슬람교 개종자를 튀르크인으로 간주해 경멸해 왔고 결국 이런 정서는 훗날 종교로 민족을 분류하는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인들과 튀르키예인들은 요리나 복식도 유사한 경우가 많다. 국민성까지 섬뜩할 정도로 닮았다. 실제로 외모로 튀르키예인과 그리스인 인종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잡은 오늘날 그리스와 튀르키예에서 두 국가의 문화가 비슷하다고 하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튀르키예의 [[케밥]]이라는 음식은 그리스에서 거의 똑같은 [[이로스]](Γύρος, Gyros)라는 음식이 있는데 서로 자기네들이 원조라고 우겨댄다.] 서로의 언어도 뿌리는 다르지만, 워낙 오랫동안 엉켜 살다 보니 그리스어-튀르키예어가 짬뽕된 [[피진]]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많았다.[* 현대 튀르키예어와 그리스어는 만 개 이상의 단어를 공유하며 그나마도 양국의 [[언어 순화 운동]]으로 적어진 것이다. 심지어는 한국어처럼 조사가 단어의 뒤에 붙는 교착어의 특징을 가졌던 중세 튀르키예어는 그리스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명사의 [[격변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스인의 튀르크화와 튀르키예인의 그리스화가 정점에 달했을 오스만 제국 중후기에는 튀르키예어와 그리스어가 현대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공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은 소속 종교밖에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교도라면 그리스인으로, 무슬림이면 튀르키예인으로 판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종교를 통한 구분 역시 현실의 사회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들 간의 문화적 교류는 굉장히 깊었고 따라서 이오아니나, 테살로니키 같은 그리스 영토에 살며 그리스어를 쓰면서도 종교는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고, 반대로 사는 곳은 아나톨리아이며 언어도 튀르키예어를 쓰지만 종교는 정교회인 경우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에 대해 종교 하나만으로 튀르키예인, 그리스인으로 선을 그어 그 동네에서 수백 년간 뿌리 내려 살던 사람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추방했다.[* 사실 이는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 자체가 다민족 국가였으니 말이다. [[보슈냐크인]]이나 포마크인 같은 슬라브계 무슬림 주민들도 많았으며 민족 전체가 독실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인 걸로 유명한 [[아르메니아인]] 중에도 엄연히 무슬림이 존재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ille_Agia_Eleni_Inscription.jpg]] >327: tarihinde bu serrif ekklesemizi >Ayia Eleni Mihail Arhangelos ismine kurtu temeli >hale ekklissiamızın uçuntu tamiri >Sefketlu Sultan Mahmut efentimiz ihsan eyletti emri >Epitropos Sarraf XA İlia oldu Tekmil nazın Mihael Arhangelosun sefaati ilan Hak ta ale >imtat etenlere ve zahmet çekenlere vere eciri >sine: 1833: Feb 12 > >327년에 이 신성한 우리의 교회는 성녀 엘레니와 미카엘 대천사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현재 모습은 우리 교회의 세번째 수리로, 위대한 술탄 [[마흐무트 2세|마흐무트]] 폐하의 명으로 이루어졌다. 명령은 감독관, 금세공인 하즈 일리아스가 받들었다. 미카엘 대천사의 중보를 기원한다. 기도하고, 노력한 일꾼들에게. >1833년 2월 12일 당시 그리스 민족과 튀르키예 민족이 얼마나 섞여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위 사진에 나타나 있는 튀르키예 [[콘야]]의 실레(Sille) 마을에 위치한 아야 엘레니(Aya Eleni) 성당의 입구에 쓰여진 명문이 있다. 명문이 [[그리스 문자]]로 적혀 있지만 그리스어가 아니라 [[튀르키예어]]다. "327년에 성 엘레니 아르항겔로스의 이름으로 성당을 세운 이래 현재의 성당은 세번째 수리를 거쳤으며, 술탄 [[마흐무트 2세]]의 명령으로 이루어졌으며, 본 공사를 위해 노력한 모든 이들과 수호성인인 대천사 미카엘에게 중보를 청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지역인 카파도키아 지방에 거주하면서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나 신앙은 정교회였던 카라만인들이 작성한 것인데 왜 이들이 그리스 문자로 튀르키예어를 쓰면서 정교회인이었는지는 의문에 싸여 있다. 원래 그리스계였으나 튀르크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되 종교만 남은 경우일 수도 있고 동로마 시절에 정교로 개종한 후 오스만 제국까지도 정교도로 남아 있는 경우일 수도 있고 본래 무슬림이었지만 그리스 민족에 동화된 경우일 수도 있다.[* 정치적 숙청 등으로 인해 몰락한 무슬림 튀르크인 지배층이 신분 세탁을 위해 지즈야를 감수하면서까지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은 여러 종교들 중 이슬람교의 지위가 가장 높긴 했지만 죄수를 처벌할 때는 딱히 그 죄수의 종교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카라만인들의 묘비나 기록들에 남은 이름들을 보면 미카일, 니콜라오스, 마리아 같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과 성씨를 붙이지 않고 ~의 아들, ~의 딸로 표기하는 옛 튀르크인들의 전통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튀르키예인들은 전통적으로 성(姓)씨가 없었으며 아타튀르크 시대에 서방식 근대국가를 지향하면서 성씨 사용법을 제정해 모든 국민이 이름뿐만 아니라 성씨를 갖게 되었다. 아타튀르크라는 성도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뜻. 많은 경우 귀찮아서 그냥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oğlu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민족들은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성씨를 가지게 되었는데 ~오을루 대신 러시아인처럼 ~프(남성)/바(여성)가 붙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아시아인들은 슬라브인이 아님에도 이름의 끝에 v가 많이 붙는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의 축구선수인 [[세르베르 제파로프|제파로프]]나 [[오딜 아흐메도프|아흐메도프]] 등등.] 이들이 살던 지역에 있는 교회에 가면 전례문을 그리스 문자로 썼는데 그리스어가 아닌 것들이 있다.[* 그리스 총리와 대통령을 여러 번 지낸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이쪽 출신이다. 튀르키예어로 "카라만인"을 의미하는 Karamanlı를 그리스어 남성명사형으로 바꾸면 대놓고 카라만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리스인들 중에는 성에 ~스가 안 붙고 튀르키예어 접미사인 ~오글루가 붙으면(예를 들어 축구선수 코스타스 미트로글루, 호주의 그리스계 축구선수인 안게 포스테크글루) 그 사람은 거의 이때 그리스로 넘어온 사람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이것은 비록 근대 이전에도 그리스어 모어 화자는 정교회를 믿고 튀르키예어 모어 화자는 이슬람교를 믿는 게 일반적이긴 했지만 꼭 반드시 그렇게 깔끔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이즈미르, 트라브존 같은 그리스 영향이 깊었던 지방은 구어로는 튀르키예어를 쓰면서도 문자는 그리스 문자를 쓰는 경우도 흔했고 코렐리의 만돌린을 쓴 저자인 루이 드 버니어의 소설, 날개 없는 새에서 이런 사회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여러 소설에도 20세기 초반 그리스인들과 튀르크인들이 서로 증오하면서도 떨어지기 힘든 관계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카잔차키스의 미할리스 대장의 배경은 19세기 말 오스만 치하의 [[크레타 섬]]인데 등장인물들은 튀르크인이나 그리스인 모두 그리스어의 방언인 크레타어를 쓴다.] 결과적으로 20세기 시점에서 튀르키예인과 그리스인을 분명히 결정하는 절대조건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남은 것은 언어와 종교밖에 없어서 '''종교만을''' 기준으로 양국은 소수 종교인(즉 그리스 입장에서는 이슬람교도,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기독교도)들을 타민족으로 간주해 추방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